메타 네트워크(Meta-network)와 궁극적인 조정자(調整者)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최문석의 세계는 빨간 비로도 톤의 내부 구조 안으로 전개된다. 그의 세계의 맥락 상, 이 높은 채도의 색은 분명 생명의 표지일 것이다. 이 내부로 열린 구조의 안쪽으로는 크게 확대된 플라스틱 재질의 정충(情蟲)이 흐느적거리듯 유영하며 육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 어떤 궁극적인 지점으로 향하고 있다. 육각형의 각 변을 따라 연장된 거울에 의해 복수의 것으로 보이도록 되어 있는 그것은 느릿한 듯하지만, 자신들이 향해야 할 그곳으로 정확하게 향하고 있다.
정충의 유영을 통제하는 생명의 이 오차 없는 지향성은 각각의 마디에 연결된 동력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라면 이 흥미로운 키네틱스와 세련된 기계작동을 논해야 할 터이지만, 맥락상 여기서는 그 운동이 함의하는 메시지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동력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을 가정해 봄으로써, 이 세계의 의미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만일 외부동력이 끊기고, 긴 꼬리가 더 이상 흐느적거릴 수 없으며, 따라서 그 미미해 보이는 지향성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 지향의 최종지점, 궁극적 만남(meeting), 곧 생명의 촉발이 영원히 일어날 수 없는 사건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생명이 부재로 돌려지고, 역사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존재는 무(無)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문석의 세계에서 가는 철사(wire)를 통해 전달되는 그 동력은 생명이라는 우주적 사건을 지탱하는 외적 힘, 곧 생명창조의 계시(啓示)적 차원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문석의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의미론적 축으로서, 그의 작품들의 세부들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환기되어야 하는 참조다.
메타 네트워크(Meta-network)
긴 꼬리를 가진 그 원초적 형태에 지향성을 제공함으로써 생명의 잠재태가 되도록 했던 그 철사들과 그것들을 통해 전달되는 동력은 하나의 중심, 힘을 발생시키는 엔진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엔진이 발생시키는 힘은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인들에도 동일하게 공급된다. 중앙의 엔진을 기준으로 외부 쪽으로는 그 한 면만이 빛을 발하도록 되어 있는 정육면체의 구조물들이 산재해 있고, 그 각각의 내부에는 초보적인 형태의 로봇으로 비유된 인간존재들이 다양한 동작을 선보이고 있다. 그것들은 동일한 엔진으로부터 전달되는 힘에 의존해 가능한 작동범위 내에서 팔과 무릎을 구부리거나 펴고, 어깨를 돌리거나 허리를 뒤로 젖힌다.
그들은 모두 중앙엔진으로부터 공급된 에너지에 의해서만 자신들의 존재적 영위가 가능한 로봇과 같은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하자. 이 부분은 기계의 존재적 담론에 의해 보충설명될 필요가 있다. 일테면 기계는 의미있는 언어사용을 도울 수도 있고, 선을 행하는 것이나 아름다움과 정의를 인식하는 행위에도 관여하고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선을 행하거나 아름다움과 정의를 인식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선이나 아름다움, 정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실행할 수 없다. 그것이 로봇과 같은 꽤나 지능을 갖춘 기계일지라도, 그것이 무언가를 실행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그의 제조자의 신념이다.
어떻든 중앙엔진으로부터 공급되는 에너지가 아니라면, 최문석의 로봇존재들은 결코 그렇게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들의 개별성은 하나의 단일한 질서에 의해 가능해지며, 다양성은 하나의 궁극적인 통일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 최문석의 이 ‘메타 네트워크(Meta-network)’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로부터 모든 것들이 출발한다. 어떤 것도 다른 것들로부터 전적으로 독립적이거나 자율적일 수 없으며, 서로는 서로를 공유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무엇보다 이 ‘메타 네트워크(Meta-network)’ 의 중심에는 그 전체를 조절하고 조정하며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하나의 엔진이 존재한다. 이 엔진으로부터 모두가 공유하도록 되어 있는 하나의 원칙인 동시에 힘이기도 한 질서가 발생하며, 그 질서는 존재가 존재로서 존재하기 전부터 작동하는 어떤 원천적인 것이다.
최문석의 ‘메타 네트워크(Meta-network)’ 는 바로 이러한 원천적 질서의 얼개를 시각적으로 재현해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바로 이러한 메타서사적 동기에 의해 그의 이번 설치 작품은 마치 생명의 설계도거나 역사의 개념도이기도 한, 동시에 삶의 얼개도거나 계보학으로 읽힐 여지도 충분한 어떤 것이 된다.
중앙엔진, 또는 궁극적인 조정자(調整者)
최문석의 ‘메타 네트워크(Meta-network)’ 는 우리로 궁극적인 질문과 마주하도록 인도한다. 그것은 불편할 수도 있으며 아마도 그로 인해 그토록 자주 외면되는 진실이기도 한 것으로 “그렇다면 이 메타서사에서 무엇이 세계 내의 모든 요인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앙엔진에 해당하는 것인가?” 이다. 곧 무엇이 우리의 궁극적인 조정자이며, 우리는 무엇에 의해 조율되거나 조작되는가? (라캉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누가 우리를 불러내는 궁극적인 호출자인가?
이 짧은 지면을 통해 이 질문에 소상하게 답하려 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즉, 예컨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겐 마르크스주의가 그러한 질서를, 원칙과 힘을 생산해내는 내적 기제의 매우 중요한 주체가 될 것이라는 사실, 또는 프로이트를 따르는 사람들은 공유된 프로이트적 신념의 지시를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동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역사의 독해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 조정자의 자리가 히틀러와 같은 폭군의 것이 되었을 때 세계는 파시스트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거나 프로이트주의자가 되거나, 여전히 파시스트가 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믿는 바가 우리 존재의 모습을 결정하고 행위를 통제하는 존재적 질서의 출처, 곧 중앙엔진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믿음은 인간정신의 최중심부에서 나타나는 행위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그 위에서나 그 안에서 존재가 하나로 통일되는 기저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존재의 최중심부에 ‘누구’를 초대해 들이는가의 문제로 귀결되며, 그것에 의해 세계와 존재와 역사와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와 행동양식이 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최문석의 세계가 질문하는 바는 이렇다 : “당신이 믿는 바는 무엇인가, 당신의 생명과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태도와 행위를 조정하는, 그렇게 함으로서 당신을 오늘날의 당신으로 만들어 왔으며, 이후의 당신으로 재조정해 갈 궁극적인 조정자는 누구인가?”
글/ 심상용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제8대학 조형예술학 석사와 박사, 파리 제1대학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